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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이 꿈꾼 것
PEOPLE | 아티스트 인터뷰 |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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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진> 편집장 김영주
글 - 정규영(<더 갤러리아> 피처 디렉터)
<p><img alt="1"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56f887b7-898e-465a-8729-f893c80aedf5" /></p> <p> </p> <p> </p> <p><strong>편집장으로서 <이매진>을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건 뭔가요?</strong><br /> 지금은 비교적 그 구분이 모호해졌지만, 당시 잡지에서 문화를 다루는 방식은 극단적이었어요. 일반인이 다가가기 힘든 ‘고급’ 문화를 다루는 전문지들이 있었고, 다른 한편에 소비적인 패션, 뷰티, 리빙을 다루는 패션지가 있었죠.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랄까. <이매진>이 그 사이의 벽을 허물고 싶었습니다. 문화라는 게 그걸 향유하는 사람의 몫이지 누군가 그걸 고급, 저급 규정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또, 앤디 워홀처럼 대중문화를 조금 더 그럴듯하게 보여주고 싶었고요.</p> <p> </p> <p><strong><이매진>을 만드는 사람들과 공유하려 했던 가치는 어떤 것이었나요?</strong><br />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독창성이었어요. 그게 참 어렵죠. 당시 잡지들은 대부분 해외 잡지를 그대로 베껴 만들었습니다. 기자들에게, 못 만들어도 좋으니까 머릿속에서 나온 걸 만들자고 이야기했죠. <이매진>은 회의를 디자이너, 포토그래퍼 등 비주얼을 담당하는 사람들과 시작부터 함께 했어요. 새로운 시스템을 만들고 싶었죠.</p> <p> </p> <p><strong>시간이 많이 드는 시스템이죠. </strong><br /> 특집 기사 만드는데 2~3일을 회의만 한 적도 있고, 회의하며 싸운 적도 있어요. 시간이 그렇게 걸리더라도 베끼는 건 싫었습니다. 기획 당시에는 기자들이 외국 잡지를 일체 못 보도록 했어요. 그보다는 영화 보기를 권했죠. 동영상에서 얻을 수 있는 아이디어 중에 잡지 만드는 데 써먹을 수 있는 게 의외로 많거든요. 영화 외에도 그림, 음악, 연극 등 다양한 문화를 통해 아이디어를 축적하는 훈련을 시켰죠. 회의 중에 디자이너가 글에 대한 의견을 제시할 수도, 기자가 사진에 대한 아이디어를 낼 수도 있었고요.</p> <p> </p> <p> </p> <p> </p> <p> </p> <p><img alt="2"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18e4bfac-0645-4f1f-9094-3c91868434cf" /></p> <p> </p> <p><strong><이매진>에 실리는 글과 사진, 편집 디자인에 대한 원칙이 있었나요?</strong><br /> “잡지는 영화다.” 20세기 초중반 < Harper’s Bazaar >의 아트 디렉터 알렉세이 브로도비치가 한 말이에요. 잡지 표지부터 마지막 장을 넘길 때까지, 영화 한 편을 보는 호흡과 비슷하다는 뜻이죠. 사실 이건 <이매진>만의 원칙이라기보단 제가 잡지를 만들며 항상 생각하는 원칙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너무 강해도 안 되고, 너무 잔잔해도 안 된다는 것. 그런 강약 조절을 신경 썼어요. 그리고 <이매진>이 ‘읽히는’ 잡지이기를 바랐습니다. 밤새고 엉덩이에 땀나도록 글을 썼는데, 아무도 안 읽으면 어떨까? 허무하겠지? 그러므로, 읽히는 글을 쓰자. 재미있고 유쾌한 글. 우리만의 문체를 만들기 위해 정해 놓은 규칙도 있었어요. 재치 있게 꼬집되 역겹지 않게. 가독성이 떨어지는 디자인은 허용하지 않았어요. 기사엔 팩트와 논리가 있어야 하고 정보는 정확해야 하고, 세부 디테일도 풍부해야 하고. 이런 부분은 편집이나 디자인에서 똑같이 지키고 싶었던 것들이죠.</p> <p> </p> <p><strong>구상한 시스템이 의도대로 굴러간다고 느낀 때는 대략 언제쯤이었죠?</strong><br /> 두어 달 정도 후쯤? 당시 팀원 중 반 이상이 저와 오랫동안 함께 일했던 친구들이었고, 사진과 디자인 팀도 이전부터 호흡을 맞춰오던 사람들이 그대로 왔어요. 시행착오를 줄이려면 무엇보다 팀워크가 중요하죠. 잡지는 ‘팀워크 플레이의 결정판’이라고 생각해요.</p> <p> </p> <p><strong><이매진>의 표지도 공동 작업의 산물이었어요.</strong><br /> 표지 콘셉트 잡는 게 가장 어려웠습니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는 지점을 만들자고 생각했는데요. 여러 문화 영역 중에서도 가장 어렵다는 미술과 대중 문화 최전방에 있는 연예인을 만나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냈어요. 그렇게 만든 첫 표지가 설치미술가 이불이 만든 작품을 얼굴에 쓴 배우 이영애의 사진이었죠. 이불과 개인적인 친분이 있었고, 그가 패션에 관심이 많았거든요. 이영애는 처음 만났을 땐 승낙하지 않았지만 의향이 있는 것 같아서 사진가, 디자이너까지 <이매진>을 만드는 스태프 스무 명쯤이 함께 섭외하러 다시 찾아갔어요. 하하. 그렇게 이영애, 이불과 함께 작업하고부터 섭외가 수월했죠. 함께 작업하는 아티스트들도 기뻐했고요.</p> <p> </p> <p><strong><이매진>의 콘텐츠는 분야별 비중이 대략적이나마 있었나요? </strong><br /> 딱히 분야별 비중을 정해 두진 않았어요. 패션지처럼 패션, 뷰티, 피처로 팀을 나눈 것도 아니었고요. 매달 하는 특집이 잡지에서 워낙 큰 부분을 차지했거든요. 특집이 다루는 주제는 무궁무진했죠. 대통령을 다루기도 했고, 마술이나 70년대를 주제로 삼기도 했고요. 특집의 주제 아래서 영화 담당 기자는 영화로, 패션 담당은 패션으로, 미술 담당은 미술로 각자의 영역에 따른 기획을 했어요.</p> <p> </p> <p><strong>잡지에 무엇을 다루는가 만큼 중요한 것이 ‘무엇을 다루지 않는가’ 아닌가 싶습니다.</strong><br /> 공포 영화 중에 ‘불편한’ 것들이 있죠. 잡지에서 그런 것까지 보여주고 싶진 않았어요. 대신 기존 잡지처럼 아름다운 것만 다루지도 않았습니다. 식상하니까. 인간사의 솔직한 부분을 보여주되 그 방식은 역겹지 않게.</p> <p> </p> <p><strong>그 사이에서 균형잡기가 어려운 일이었겠습니다. </strong><br /> 마르셀 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 있죠. 남자 소변기를 거꾸로 세워놓고 작품이라고 하니 사람들이 놀랐어요. 하지만 역겨운 방식으로 보여준 건 아니죠. 물론 그걸 넘어서는 것들도 나름의 가치가 있지만, 우리가 그 선을 넘고 싶진 않았어요.</p> <p> </p> <p> </p> <p><img alt="3"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1cfc05e5-170c-42e4-b5a0-82e505e6a41e" /></p> <p> </p> <p><strong><이매진>의 한 달은 어떻게 구성됐나요? </strong><br /> 일반 잡지들과 그리 다르진 않았어요. 기획하고 취재하고 마감하고. 아무튼 일을 무지막지하게 했어요. 외부의 도움도 많이 받았죠. 여러 사진가와 작업했고, 편집 디자인 같은 경우에도 내부 팀 이외에 다른 크리에이터에게 일정 부분 맡길 때도 있었어요. 그래도 기본적으로 한 달에 80퍼센트는 다들 야근을 했어요. 주말은 물론 없었죠. 그땐 다들 젊었거든요. 편집장인 저도 30대 중반이었어요. 살면서 제일 열정적일 때였죠.</p> <p> </p> <p><strong>잡지를 만들 때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대상 독자층을 설정하는 것 같습니다. <이매진>의 대상 독자층과 실제 독자는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달랐나요? </strong><br /> 나이와 성별은 중요하지 않았어요. 대신 중요한 건 취향. 수입 중 30퍼센트 정도를 문화 생활에 쓸 수 있는 사람이 우리의 독자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독자 엽서를 받아보면 30대 남자들이 많았죠. 가장 움직이기 힘들다는 남자들 말이에요. 하하. 당시엔 < GQ >나 <에스콰이어> 같은 남성 잡지가 활성화되기 전이죠. 그들이 <이매진>을 본다는 사실이 고마웠습니다. 마감할 때 손으로 쓴 엽서를 받으면서 힘도 냈고.</p> <p> </p> <p><strong><이매진>에서 가장 성공적이었던 기획은 뭔가요?</strong><br /> 아무래도 이영애와 이불이 함께한 첫 번째 표지가 기억에 남아요. ‘자연’을 특집으로 한 호도 좋았고요. 문화를 풍성하게 즐기면서도 자연이나 환경 같은 사회적 이슈에 무관심한 사람들이 많았는 데요. 패션 잡지에서도 제품으로 다루지 조금 더 깊숙이 들어가진 않았어요. 그걸 앞서서, 우리 식으로 고민하고, 나름대로 풀어냈으니까. 어제 <이매진>에서 한 인터뷰를 죽 훑어봤는데 책에 나온 인터뷰이들을 보고 많이 놀랐어요. 언더그라운드 밴드가 나오는 한편 조용필도 나오고, 돌아가신 코미디언 이주일이 나온다면 김기덕 감독도 나왔고.</p> <p> </p> <p><strong><이매진>은 ‘새로운’ 문화를 다루는 잡지 아니었나요?</strong><br /> 사람들이 <이매진>을 언더그라운드 문화와 실험적인 젊은이를 대상으로 했던 매체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그때나 지금이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요. 상업적으로 성공하고 싶었어요. 사실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죠. 잡지가 오래 가고 많은 사람이 공감하도록 하려면, 만드는 사람이 보는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 중간에서 타협점을 찾는 게 중요해요. 전방위의 사람들이 잡지로 들어와서 그들 사이의 벽도 사라지고, 문화 사이의 벽도 사라지기를 바랐어요.</p> <p> </p> <p><strong>그렇게 열심히 만든 <이매진>은 결국 살아남지 못했죠.</strong><br /> 지금은 더하지만, 그때도 잡지 판매의 중요성이 약해지고 있었어요. 독자보다 광고주의 파워가 무섭게 부각되기 시작했죠. 그게 결국 <이매진>이 오래 살아 남지 못한 이유예요. 광고주들이 문화 잡지에 대해 가진 인식의 벽을 허물지 못했어요. < Rolling Stones >같은 외국 문화 잡지엔 패션 광고가 자연스럽게 들어가는데 우린 그렇지 않았죠. 그렇게 1년 동안 <이매진>을 만들고 회사에서 폐간하겠다고 결정했어요. 극단적인 결정이었죠. 불꽃처럼 살다가 꺼진거예요. 하하. 사실 <이매진>은 돈을 많이 쓰는 잡지였어요. 종이도 좋은 걸 썼고, 스태프 수도 많았고요. 회사에 고마운 부분도 있지만, 그렇게 한 번에 폐간시키기 전에 제작비를 줄이고 좀 더 질기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줬다면 우리가 모여서 어떻게든 하지 않았을까 싶어요. 독자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못했죠. 기억이 정확하지 않아서 마지막 호 편집장의 글을 봤더니 폐간에 대한 얘기가 없었어요. 다음 호 기획회의 하는 와중에 폐간이 결정됐으니까, 아무한테도 변명하지 못 했죠.</p> <p> </p> <p> </p> <p><img alt="4"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c851214a-0af6-47de-9790-2bea4f6f2f0a" /></p> <p> </p> <p><strong>오래 잡지를 만들어온 당신에게 1년 간의 <이매진> 편집장 기간은 어떤 의미인가요?</strong><br /> 기분 좋은 소나기? 잡지를 만들면서 타의로 회사를 그만둔 유일한 경우였어요. 사실 <이매진>에 오기 전과 후, 여러 잡지에서 편집장 제의를 받았죠. 그럼에도 <이매진>을 선택한 나 자신에게 고마워요. 그 때 아니면 언제 해보겠나, 그런 생각으로 시작했고, 지금도 다르지 않아요. 공부를 많이 했고, 그 후의 잡지 경력에서도 <이매진> 시절이 영향을 끼쳤죠.</p> <p> </p> <p><strong>독립 매체를 만드는 편집자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요?</strong><br /> 사실 저는 회사 밖에서 잡지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잡지를 보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다면 그가 ‘갑’이라는 거예요. 만드는 사람이 1백 퍼센트 만족하는 잡지를 만들고 싶다면 잡지를 어떻게 판매하고 유지하느냐는 건 고민거리가 되지 않겠죠. 하지만 자기 소신과 느낌을 누군가에게 전달하고 공유하기 위해 잡지를 만든다면 독자의 마음을 먼저 헤아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바람은, 정말 잘 살아남아야 한다는 거예요. 먼저 비슷한 시도를 했던 내 입장에선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여러분 제발 살아 남으시고, 돈도 버세요.”</p> <p> </p> <p><strong>어려운 질문인데요. 어떻게 생존할 수 있을까요? </strong><br /> 결국, 독자를 움직이면 될 거라고 여전히 믿어요. 그리고 잡지의 완성도를 높이는 것만큼 생존을 위한 마케팅이라든지, 다양한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그리고 여전히 종이 매체를 만드는 젊은 편집자들에게도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예전 <이매진>을 훑어보다 ‘라디오는 영원하다’라는 특집 호 편집장의 글에 “종이가 과연 살아남을 것인가?”라는 고민을 쓴 걸 발견했어요. 16년 전에 똑같은 고민을 했는데, 종이 책은 지금 멀쩡히 살아 남아 있잖아요. 나는 종이 매체가 반드시 살아남는다고 믿어요.</p> <p> </p> <p><strong>하지만 많은 종이 매체가 사라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죠. </strong><br /> 저는 새로 나온 디지털 기기는 다 사봐야 하는 ‘얼리 어답터’예요. 하지만 종이라는 매체의 고유한 매력이 있죠. 어떤 시인이 종이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는 기쁨, 그 촉감은 인간이 죽는 날 까지 못 잊을 거라고 썼는데요. 종이는 디지털 매체가 보여주지 못하는 걸 보여줘야 한다고 봐요. 긴 호흡과 긴 흐름을 가진, 많은 정보보다는 어떤 사안을 깊숙이 파고 들어가는 글. 크고 여운을 주는 사진 같은 것. 컴퓨터 모니터나 태블릿 PC에는 없는 종이 책만의 호흡이 있어요. 종이가 살아남으려면 그 호흡 속에서 자꾸 다시 들춰보고 싶은 여운을 주는 쪽으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이 디지털 세상에서 종이를 다루는 젊은이들이 매체 특유의 긴 호흡으로 길게 살아남았으면 좋겠습니다.</p> <p> </p> <p> </p> <p> </p> <p> </p> <p><iframe allowfullscreen="" frameborder="0" height="360" mozallowfullscreen="" src="https://player.vimeo.com/video/72787616" webkitallowfullscreen="" width="640"></iframe></p> <p><a href="http://vimeo.com/72787616">제4회 KT&G 상상마당 어바웃북스 '오늘 꺼내본, 어제의 잡지' - 이매진 김영주 편집장 인터뷰</a> from <a href="http://vimeo.com/user3708130">KT&G sangsangmadang</a> on <a href="https://vimeo.com/">Vimeo</a>.</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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