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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 아티스트 인터뷰 | 2017.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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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TL 매거진 > 에디터 김선미
글 - 나지언(데이즈드 앤 컨퓨즈드 코리아 피처 디렉터)
<p><img alt="1"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2ae9a4b3-48e3-453f-8057-1c63d77ebebb" /></p> <p> </p> <p><strong>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나요?</strong><br /> '포니테일 크리에이티브'라는, 기획과 디자인을 함께하는 집단을 운영하고 있어요.</p> <p> </p> <p><strong>< TTL 매거진 >에서 일한 시기는 언제인가요? </strong><br /> 1999년 7월호가 창간준비호인 0호였고, 2004년 5월호를 마지막으로 폐간됐어요. 전 2001년부터 폐간 때까지 일했죠. 총 32권 정도 만들었던 것 같아요.</p> <p> </p> <p><strong>어떻게 < TTL 매거진 >에서 일하게 됐나요? </strong><br /> < TTL 매거진 >은 TTL 광고를 집행하던 화이트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사와 그래픽을 담당하던 홍디자인이라는 회사가 같이 만들었어요. 대학교 4학년 때, 화이트 커뮤니케이션에서 대학생 크리에이터들을 뽑는 과정에 응모했죠. 원래는 ‘조동원의 카피 세상’이었다가, 10기를 거대하게 재구성하자고 해서 ‘화이트 넥스트 1기’라는 이름으로 다시 출범한 과정이었어요. 광고, 잡지, 인터넷, 영화에 대한 창의성 교육을 받는 커리큘럼이고요. 홍디자인의 홍성택 선생님 강의를 듣거나 직접 거리로 나가서 트렌드를 찾고, 글쓰기도 배웠어요. 그 과정이 끝날 무렵, 잡지나 광고, 영화 쪽에 지원을 할 수 있었는데, 제 1지망을 잡지로 한 거죠. < TTL 매거진 >의 게스트 리포터로 들어갔어요. 처음에는 분리돼 있었던 홍디자인과 화이트 커뮤니케이션, 두 회사가 ‘후즈 커뮤니케이션’이라는 회사로 통합됐고, 편집부와 디자인팀이 다함께 모여서 일하게 됐습니다.</p> <p> </p> <p><strong>독자 혹은 < TTL 매거진 >에서 일하고 싶은 열망을 가진 학생의 입장에서 < TTL 매거진 >이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뭐였나요? </strong><br /> 사실 입사 전에는 주의 깊게 보지 않았어요. 하하. 기업 마케팅의 속성을 가진 잡지에 그 기업에 관한 얘기가 단 한 줄도 없다는 게 매력적이었죠. 제가 처음 들어갔을 때는 < TTL 매거진 >이 듀얼 북 형식으로 나왔거든요. 한 가지 화두로 한 쪽 책에서는 기사로, 다른 쪽에서는 시각적으로 풀었는데 그 재미가 무엇보다 컸어요. 주제가 ‘시험’이라면, 그걸 전방위로 해석해서 자유롭게 펼쳐놓는 점이 흥미로웠어요.</p> <p> </p> <p> </p> <p> </p> <p><img alt="2"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bc9ecc90-657a-4a40-8bef-6dc313e0ac78" /></p> <p> </p> <p><strong>초창기 < TTL 매거진 >의 가장 큰 특징은 '독자’ 혹은 '아마추어 아티스트'의 참여였습니다. 당시 독자엽서를 보면 아마추어 말고 프로 작가의 작품 좀 실어달라는 볼멘 소리도 있을 정도였는데요. 초반에는 아마추어 아티스트의 작품을 어떻게 선택하고 구성하는가가 책의 중요한 모토였는데, 그들의 작품을 싣는 데 있어서 어떤 기준은 없었나요? </strong><br /> 일상을 그대로 포착하는 게 기준이었던 것 같아요. 인터넷이 막 태동하던 시기였잖아요. 동호회 문화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고 비슷한 취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고 싶어할 때였죠. 그러다 보니 그들의 현재 상황을 그대로 담는 게 모토였어요. 어설프고 조금은 힘이 없어도 그 사람이 자기의 일상을 그대로 담았다면 일단은 합격. ‘같은 시간, 다른 시각’이라고, 모든 사람이 동일한 날짜와 시간에 사진을 찍어 보내는 그 칼럼은 아예 일상을 그대로 포착하는 기획이었죠. 스무 살의 일상을 포착하는 틀을 만든 거예요.</p> <p> </p> <p><strong>지금 보면 황당한 것도 많아요. '생일'이 주제일 때 똥으로 된 케잌을 만들어 보내거나 ‘Fly’가 주제일 때 하늘을 날 수 있는 조형물을 만들어 보내는 등, 당시의 독자들은 날 것 그대로를 드러내는 데 거침이 없었던 것 같아요. </strong><br /> 지향점 중에 하나였죠. 목소리를 내는 사람이 20대 주체라면 그들이 하는 것에 대해 필터링을 많이 하지 말자는 동의가 있었어요. < TTL 매거진 >이 중후반으로 넘어가면서 좀 정제되기도 했는데, 돌이켜보면 잡지로서의 매력이 더 있었던 건 초반 같아요.</p> <p> </p> <p><strong>지금도 활동하고 있는, 자기만의 개성과 색깔이 있는 사진가들, 예를 들어 사이다나 김지양, 김현성, 박지혁, 박기숙, 김윤경태가 당시 < TTL 매거진 >과 함께 작업했어요. 사진가를 고르는 시각도 남달랐을 것 같은데 어떤가요? </strong><br /> 당시는 스무 살이라는 걸 완벽히 재정의해야 하는 타이밍이었어요. 기존과는 다른 게 중요했죠. 기성작가를 쓰는 건 애초부터 우리의 방향이 아니었어요. 완벽하게 새롭게 볼 수 있고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할 수 있는 크리에이터를 찾는 게 관건이었습니다. 개조한 집을 사무실로 썼는데 1층에 디자인 팀이 있고 2층에 편집 팀이 있었거든요. 지금도 기억나는 게, 자기 업무를 보다가 누군가 찾아오면 1층으로 내려가서 일러스트레이터나 포토그래퍼의 포트폴리오를 보는 순간이 빈번했어요. 그게 다른 일들보다 우선이었죠. 디자이너와 에디터가 함께 모여 포트폴리오를 보면서 어떤 느낌이라는 걸 간략하게 토론하고 그걸 데이터베이스로 모아 놓는 거죠. 그러다가 다음 달에 그들과 작업해보고. 그런 과정이 전혀 부담이 없었어요. 이래야 한다는 전제가 없고, 이 정도의 퀄리티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도 없었기 때문에 작업이 수월했죠.</p> <p> </p> <p><strong>누구나 찾아와서 포트폴리오를 줄 수 있는 분위기였나요? </strong><br /> 네,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독자들도 그랬어요. 독자들이 우리 점심 먹을 때 와서 같이 점심도 먹었어요. 그들 중 몇몇이 인터뷰하는 곳에 따라가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갔죠.</p> <p> </p> <p><strong>< TTL 매거진 >은 다양한 직업에 관한 스펙트럼을 보여줬어요. 광고나 잡지업계가 배경이 된 1990년대 드라마가 많았던 것처럼, 만화, 영상, 광고 등 20대들이 선망하고 새롭게 도전하고 싶어하는 분야의 젊은이들을 인터뷰하는데 열심이었죠. </strong><br /> 20대를 정의하는 데 있어서 그 부분이 굉장히 중요했어요. (꿈이) 현상으로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그 사람의 직업이 되거나 그 사람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무엇이 된다는 증거를 보여줄 필요가 있었으니까. 한대수, 봉준호 감독 등 유명 문화 인사들의 20대 얘기를 듣는 칼럼이 있었는데 그 역시 (다양한 직업을 보여주는) 또 다른 방법이었죠.</p> <p> </p> <p><strong>김윤경태의 일반인 인터뷰는 당시 < TTL 매거진 >의 콘셉트를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기획이었어요. 혼자 나가서 직접 인터뷰이를 정하고 즉석에서 인터뷰하고 사진 찍는 그 칼럼 등, 당시의 유스 컬처를 포착해내는 데 있어 < TTL 매거진 >은 다각도로 접근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strong><br /> 맞아요. 화자를 누구로 두냐에 따라 인터뷰이와의 간극이 다르죠. 포토그래퍼 스스로가 인터뷰어가 됐을 때 또 다른 관점이 생길 거예요. 덕분에 < TTL 매거진 >에 대한 포토그래퍼의 호감도가 꽤 있었던 것 같아요. 기존의 제한 때문에 못했던 것들이 가능하다는 인상이 전반적으로 있었어요. 사진에 대한 특정 기준이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더 자유로운 토론이 가능했던 것 같아요. 몸에 좋은 음식에 대해 얘기하는 칼럼이 있었는데 그 음식들을 실제로 모델 몸에 스타일링해서 보여준 적도 있었죠. 진짜 황당한 것도 많았어요. 얼마 전에 다시 보고 기겁한 칼럼이 있는데 맥주가 머릿결에 좋다며 맥주에 정말 머리를 감기도 했어요. 하하. 지금 생각해보니 표지의 콘셉트가 ‘패턴화’였던 시기도 있었는데요. 아무 오브제나 가지고 패턴화했어요. ‘낯설게 보기’의 한 방법이랄까? 어떨 땐 파를 붙이기도 하고 어떨 땐 목장갑을 붙이기도 하고. 하하. 왜 그게 파여야 하는지에 대한 개념이 없었죠. 단순히 조형적인 즐거움만 가지고 만든 거예요. ‘이 파가 이 인터뷰이랑 어떤 연결고리가 있지?’라는 당위성이 필요한데 당시엔 그런 게 필요 없었어요. 재밌으면 했죠.</p> <p> </p> <p><strong>시기 자체가 파를 붙이게 했던 게 아닌가 싶어요. </strong><br /> 초창기 인물 인터뷰 사진을 찍을 때는 전부 눈을 감아야 했어요. 지금이 아닌 새로운 지평을 상징한다고. 인터뷰이 입장에서는 얼마나 황당했겠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생산자들의 즐거움을 위한 게 컸죠. 한 가지 아이디어가 나오면 원고, 디자인, 사진 등에서 다양하게 변주했어요. 사진과 타이포그래피가 < TTL 매거진 >의 정체성을 규정하기도 했고요.</p> <p> </p> <p> </p> <p><img alt="3"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99f063f2-50bb-49a9-8f24-2fd247c5976d" /></p> <p> </p> <p><strong>< TTL 매거진 >의 디자인은 텍스트로만 이루어진 페이지, 세로쓰기 페이지 등 파격 그 자체였어요. 무엇보다 한글 디자인의 활용이 훌륭했고요. 어떻게 하면 더 파격적이고 신선하게 보이는가가 디자인의 원칙이었나요? </strong><br /> 거기엔 홍디자인이라는 회사 자체의 탄탄함이 있었던 것 같아요. 새로운 타이포그래피와 편집 디자인을 추구했고, 가독성뿐만 아니라 디자인의 즐거움까지 고집했어요. < TTL 매거진 >은 자유로운 잡지였기 때문에 더 많은 시도가 가능했던 거죠.</p> <p> </p> <p><strong>기사, 사진, 디자인과 관련해 참조로 보던 외국 서적이나 잡지는 어떤 게 있나요? </strong><br /> 외국에서도 문화 잡지가 많이 발간되던 시기라서 디자이너들이 주제에 따라 다양하게 참조했다고 하더라고요. 타이포그래피과 관련해서는 < Bassline >을 봤던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한 가지 주제를 다양하게 변주했던 < Brutus >도 많이 봤어요. < Studio Voice >처럼 주제를 시각화하는 잡지들도 테이블 위에 있었던 기억이 나고요.</p> <p> </p> <p><strong>초반에는 시험, 모험 등 단순한 키워드를 기사화했다면 중간에는 당시 시대상을 반영하는 문화 요소들을 < TTL 매거진 >만의 시각으로 정립해 새로운 개념을 만들어냈어요. 안티 리퍼블릭, 조선 펑크, 약관 프로페셔널리즘, 인스턴트 리딩, 스무살 경제 테트리스 같은 주제어는 문화 신조어였죠. </strong><br /> 현상을 우리만의 키워드로 만드는 시도였어요. 기획회의 할 때 어마어마하게 많은 얘기들이 나왔는데요. 뜬금없지만 자기 입장에서 중요한 두 가지가 결합돼 있는 단어가 많았어요. 그런 과정에서 ‘약관 프로페셔널리즘’ 같은 단어가 나온 거죠. 우리가 수집하고 경험했던 수많은 20대의 유의미한 경험들을 조합하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자문위원들의 조언도 받았고요. 현상을 개념으로 인식할 수 있도록 문자화하고 아트 워크하는 과정도 병행했습니다. 그 개념들이 20대에게 화두가 됐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들이 경험하고 생각하는 걸 규정해줬다는 생각은 들어요.</p> <p> </p> <p> </p> <p><img alt="4"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bc4eac0f-6833-4224-bcb6-b1360c7dcc42" /></p> <p> </p> <p><strong>1990년대 잡지 변천사가 < TTL 매거진 >의 역사에 녹아있는 듯해요. 초반에는 실험적이고 독자 참여적인 날 것의 느낌이었다면, 2000년대 초반으로 넘어가면서 당시 인기 있던 문화 비평지로 방향을 선회했어요. 김영하, 신현준, 강만섭 같은 사람들의 글이 실리고 그들이 편집자문위원으로 참여했어요. 그 변화에는 어떤 계기가 있었나요?</strong><br /> < TTL 매거진 >은 몇 번 큰 틀을 바꿨어요. 처음에는 규정된 타겟인 스무 살의 일상을 그대로 보여주고자 했고, 그 다음 단계에서는 그들을 이끌 수 있는 잡지가 돼보자 해서 그 당시 전문가를 많이 등장시켰고, 세 번째 단계에서는 소장할 수 있는 잡지를 만들어보자 해서 20대를 상징하는 키워드를 ‘문화 딕셔너리’로 만들었어요. 그 과정에서 조금씩 글 쓰는 사람이나 디자인하는 사람도 변화했죠. 기업 마케팅의 일환이라는 정체성이 있었기 때문에 매년 리뉴얼을 진행하는 동시에 매년 진화한다는 인상을 줄 필요가 있었어요. 또한 20대의 성향이 급변하는 시기라는 점도 반영됐어요. 처음에는 그들이 자신의 저작물을 보여주는 걸로 즐거워했다면 이제 그걸 대체하는 다른 플랫폼, 예를 들어 인터넷이 발달하다 보니 그에 대한 관심이 축소된 것도 있었죠.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다음 국면으로 넘어가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드네요. 하지만 ‘이끌어가는 잡지’라는 모토로 움직일 때도 바라보는 시각의 차별화는 확실히 있었어요.</p> <p> </p> <p><strong>오리엔탈리즘이 주제일 때, 동양인과 서양인의 관점 차이를 화보로 구성한 게 기억나네요. </strong><br /> 제가 진행한 거예요. 하하. 기획 중에 ‘20인의 지구’라는 것도 있었어요. 가족 구성원 누구의 친구의 친구, 이런 식으로 네트워크가 연결되는 걸 화보로 보여주는 거였죠. 시작은 우리 편집부가 잘 가는 커피숍 딸이었는데요. 인터뷰이가 주변의 일반인이다 보니, 그런 식으로 섭외의 방향도 다양했어요. 우리 주변 사람들은 누구나 인터뷰이가 될 수 있었죠. 주변 사람들이 기획의 모티브가 되기도 했고요. 그게 우리의 기준이라면 기준이었을 거예요. 기획하는 데 어떤 큰 장애는 없었던 것 같아요.</p> <p> </p> <p><strong>글 쓰는 방식도 달랐나요?</strong><br /> 에디터 대부분이 20대 중반이었어요. 에디터 자체가 < TTL 매거진 >의 대상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고, 데스크도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이었으니까. 기획하거나 원고를 쓸 때 우리는 송신자이기도 했지만 수신자이기도 한 거죠. 직접 체험하고 쓰는 원고도 있었고요.</p> <p> </p> <p><strong>가장 기억에 남는 기획이 있다면 뭔가요?</strong><br /> 연애로서의 인간관계를 직접 체험하면서 쓴 기사가 생각나네요. 소개팅도 해보고 주변의 마음에 드는 남자와 얘기도 하면서 가감 없이 쓰는 거였어요. 기사에 나오는 인물이 자신이냐고 묻는 사람들도 많았죠. 하하. 그리고 아마 다시는 못해볼 것 같은데 군대 기사가 기억나요. 군대는 20대 남자들이 가장 크게 겪는 인생의 전환점인데, 그걸 제대로 다뤄보는 기획이 없었거든요. 거부감 없이 군대를 새롭게 구현한다는 명분도 있었고요. 인제 진격부대를 섭외해서, 그 안에서 인터뷰도 하고 화보 촬영도 했죠. 심지어 목욕하는 신도 촬영했어요. 그들이 맛스타라는 군용 음료를 쥐어주던 게 생각나요. 하하. 우리가 생각하는 자유분방한 20대와는 전혀 다른 20대를 경험했죠.</p> <p> </p> <p><strong>기획과 관련해서는 굉장히 실험적이고 열린 편집부였지만,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실리지 못한 기사나 사장된 기획이 있나요?</strong><br /> 그건 잘 기억이 안 나요. 하하. 하지만 마지막 호에 관해서는 슬픈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어요. 2004년 5월이 마지막 호였지만 2004년 4월호까지만 인쇄된 잡지로 나왔어요. 2004년 5월호를 위해 기자들이 발로 뛰어다니며 서울 지역의 지도를 만들었어요. 인포그래픽도 일러스트레이터가 재구성하는 거였고요. 톤부터 좌표 쓰는 방식 등 공이 많이 들어간 작업이었는데 그걸 PDF로밖에 못 본다는 아쉬움이 있죠.</p> <p> </p> <p><strong>SK 텔레콤으로부터의 압박이나 요청은 매년 리뉴얼을 해야 한다는 것 말고는 정말 없었나요? </strong><br /> 대부분 아주 좋은 클라이언트었다고 회상하고 있어요. 하지만 일하다가 딱 한번 불려간 적이 있어요. '공포'가 주제여서, 공포를 느낄 수 있는 걸 총동원해서 잡지를 만들었는데요. 공포의 요소들로 글을 쓰고 거기에 맞는 사진들을 배열하는 ‘스토리텔링 화보’였는데, 제 원고가 당시의 화두였던 20대 자살을 조장한다는 게 불만의 골자였죠. 근데 당시 홍정민 편집장님은 대표님 방을 나오면서 제게 절대 위축되지 말라고 하셨어요. 하하. 어린 마음에 고맙고 감사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세련된 위안이었던 것 같아요. </p> <p> </p> <p><strong>폐간은 어떤 이유에서 결정된 건가요? </strong><br /> 마케팅 비용 등 여러 가지 문제가 있었던 듯해요. 이제는 기업이 잡지 발행 및 유통이 가능한 자본을 만들어주지 않을 때, 어떻게 그 자율성을 실현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도 필요할 것 같단 생각이 들어요. 그때의 경험을 토대로, 책이 유지되려면 단순히 좋은 콘텐츠와 디자인을 담는 게 아니라 그게 유지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싶은 거죠.</p> <p> </p> <p><img alt="5" src="//testjh.innodis.net/feah/temp/2017/201706/aed98af8-28cb-4817-8320-5aa8d678de43" /></p> <p> </p> <p><strong>< TTL 매거진 >에서 일했던 한 사람으로서, 잡지 콘텐츠나 방향에 대한 아쉬움은 없었나요? </strong><br /> 막판에는 너무 아카이브 역할을 하고 싶어 했던 것 같아요. 창조보다는 기존의 것을 어떻게 편집하느냐에 관심을 갖고 ‘00’가 봐야 할 만화 100선 같은 기획을 했는데, 그 과정이 애초의 < TTL 매거진 >의 매력을 조금 어정쩡하게 만든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개인적으로 드네요. 있는 그대로를 새롭게 보는 게 매력이었는데, 후반부에 가면서 조금은 학술적으로 흐르지 않았나 싶어요.</p> <p> </p> <p><strong>당신의 20대에 < TTL 매거진 >은 얼마나 영향을 미친 것 같나요?</strong><br /> 20대에, 직접 경험하는 것들과 간접 경험하는 것들이 동일하게 진행됐어요. 내가 간접 경험하는 것들이 직접 경험이 되는 시기였죠. 내가 객체가 되기도 하고 주체가 되기도 한 경험 때문에, 오히려 사안을 더 분명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긴 것 같아요. 단순히 취재하고 글 쓰는 에디터 역할을 넘어서 글이 됐든 뭐가 됐든 하고자 하는 걸 해보자, 기획하는 사람이 되자고 했던 건 그 때의 경험에서 나온 거죠.</p> <p> </p> <p><strong>1990년대 문화를 얘기할 때 허세와 키치라는 단어를 빼놓을 수 없어요. 누구나 글을 쓰고 창작품을 만들게 된 배경에는 < TTL 매거진 >도 큰 역할을 했고요. 1990년대를 대표하는 문화 중에 < TTL 매거진 >이 가장 잘 포착해낸 정수가 있다면 뭘까요? </strong><br /> 개인이 문화생산자가 되는 것. 어설프고 작았지만 각자가 그 생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가능하게 만들어준 플랫폼이 < TTL 매거진 >이었던 것 같아요. 물론 작품의 질을 담보할 순 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것들을 유의미하게 바라봐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개개인이 다 생산자고 주인이라는 인식의 시발점이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p> <p> </p> <p><strong>고루한 질문이긴 하지만 잡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 TTL 매거진 > 에디터로 일했던 선배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나요?</strong><br /> 다양한 데 관심이 많은 것도 좋은데, 관심 있는 것들에 한 번 깊이 들어가 보는 것도 필요해요. 관심 있는 분야가 있다면, 그것의 역사부터 다양한 사람들이 어떻게 향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공부해보는 걸 권하고 싶네요. 아마도 그러면 내 것을 만드는 게 더 쉬울 거예요. 지금을 제대로 보는 것도 좋지만, 지금을 관통하는 과거를 공부하는 것도 필요한 과정이에요.</p> <p> </p> <p><iframe allowfullscreen="" frameborder="0" height="360" mozallowfullscreen="" src="https://player.vimeo.com/video/72787968" webkitallowfullscreen="" width="640"></iframe></p> <p> </p> <p>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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