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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UMN | 오늘의 인물 | 2017.0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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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하나 뿐인 그대 '만화가 안노 모요코'
글 - 안은별(전 <프레시안> 기자)
<p><img alt="1" src="/feah/temp/2017/201706/ec04b397-b2d4-4bd5-bbee-42181a83758f" /></p> <p>열여섯 살의 어느 날 나는 대여점에서 빌린 19금 연애 만화를 읽다 충격을 받았다. 적나라한 성애 묘사 때문이 아니라, 세계관을 뒤흔들 만한 통찰이 있어서가 아니라, 편집 실수로 한 쪽이 빠진 게 아닌가 싶은 결말 때문이었다.</p> <p><br /> 그 만화는 안노 모요코의 <해피마니아>. 특별한 직업도 미래에 대한 고민도 없이 ‘진정한 사랑’만이 행복을 가져다주리라 믿으며 온갖 남자에게 달려드는 스물다섯 시게타의 좌충우돌을 그린 만화다. 10권 내내 셀 수 없이 많은 남자를 전전하던 시게타는 결말을 몇 쪽 앞두고 마침내 1권부터 자기만을 바라보던 촌스러운 연하남 다카하시와 징한 인연 끝에 맺어지는데, 자못 감동적이라 박수를 보내려던 순간이었다. 드디어 결혼식장, 허나 시게타의 표정이 이상하다. 몹시 초조해하던 그녀는 진짜 사랑과 행복을 찾겠다며 결혼식장에서 도망치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끝. 잘못 읽었나 싶어 세 번을 다시 읽은 다음, 잘못 읽지 않았음을 알았을 때,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p> <p><br /> ‘그들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더라도, 어쨌든 구두점을 찍는 시점에서는 주인공에게 일어난 성장과 변화를 그럴듯하게 꾸며내는 게 일반적인 연애 서사라고 생각했다. <해피마니아>는 거의 99% 지점까지는 그런 기대를 갖게 하더니, 그 기대를 조롱하는 결말을 홱 던져버리는 만화였다. 그리고 나는 안노 모요코의 그런 패기를 좋아했다. 보다 정확히는, 내가 갖지 못한 거침없는 태도를 동경했던 것 같다.</p> <p><br /> 안노 모요코는 1971년에 태어나 1989년에 데뷔했고, 장편 창작 활동으로는 1995년부터 약 10년간을 피크로 볼 수 있는 여성 만화가다. 남녀 모델들의 수상한 동거를 다룬 <젤리 인 더 메리고라운드>, 교외 단지에서 벌어지는 패륜적 연애담 <러브 마스터 X>, 존재감 제로의 남학생의 인기남이 되기 위한 사투를 그린 <꽃과 꿀벌> 등 한국어로 번역된 작품들이 대표작이다. ‘순정만화’ 코너에 놓여 있었지만 가슴 설레는 설정이나 연애담의 기승전결과는 거리가 멀었고 지저분하게 휙휙 그은 펜선 역시 같은 책장에 꽂혀 있던 작가들과 구별됐다. 패션 화보 같이 화려했지만, 개그 만화처럼 키득거렸다. 회전목마에 탄 듯 종잡을 수 없는 작풍이었다.</p> <p><br /> 일본 소녀만화의 계보에서 그녀는 오카자키 교코 다음에 이름이 놓일 만하다. 오카자키는 버블 시기의 도쿄를 배경이자 주인공으로 하여 얼기설기한 펜 터치로 황폐한 여성성을 표현하여, 기존의 웅장하고 아름다운 순정만화의 경향과 결별하고 아이콘의 반열에 올랐던 작가다. 안노 또한 90년대의 도쿄를 배경으로 약하고 때로는 저열하기까지 한 여성의 욕망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되, 좀 더 현란했으며 취하는 소재도 다양했다. 어쨌든 이런 맥락과 세분화된 독자층, 그걸 받쳐주는 매체가 존재하는 현지에서 안노의 인기는 상당했지만(게다가 그녀는 패션·뷰티 아이콘이기도 하다.) 2000년대 초반 한국, 거기다 내가 속해 있었던 여고생 독자 시장에서는 어디 끼기가 애매한 존재였다. 만화를 1년에 한두 편 즐기던 보통 여자아이들에겐 야자와 아이 정도면 충분했고, 코믹월드에 드나들며 만화 취향을 가꾸던 오타쿠 여자애들에게 여자만화란 ‘가오가 안 서는’ 존재였던 것이다.</p> <p><br /> ‘오직 하나뿐인 그대’란 말을 들었을 때 안노 모요코를 떠올린 이유는, 그런 지형 속에서 홀로 열광한 기억이 있다는 게 첫 번째다. 2000년대 초반 시공사나 학산에 안노를 좋아하는 편집자가 있어서, 패션과 서브컬처 모두에 관심을 가진 20대 중후반 여성을 노리고 언젠가 오카자키까지 소개해 내리라는 야망을 가지지 않았을까 예상해 본다. 그런 계산이라면 안노는 내게 자연스럽게 도달해선 안 되는 작가였다. 활시위는 저 쪽으로 당겼는데 엉뚱한 데서 정확히 맞은 꼴이랄까.</p> <p><br /> 두 번째 이유. 만화가를 꿈꾸며 그녀의 그림을 열렬히도 베껴 그렸기 때문이다. 물론 그때는 많은 작가의 그림을 따라했지만, 공들여 카피해 동인지란 형태로 발표하기까지 한 그림체의 주인은 안노 모요코가 유일하다. 하루에 펜 선만 10쪽씩 그어 보라는 교본의 가르침이 지루했던 시절, 막 그린 듯한 안노의 그림체는 쉬워 보였지만 결코 자연스럽게 안 되는 신기루였다. 지금은 분야를 막론하고 왠지 쉬워 보이는 표현이야말로 고수의 레벨임을 알지만 말이다.<br /> 그리고 오랜만에 그녀의 만화를 읽다 또 하나의 이유를 발견했다. 안노의 세계 속에서는 도쿄와 도쿄가 아닌 곳, 화려한 세계와 평범한 세계, 예쁘고 옷 잘 입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인기인과 비인기인의 위계질서가 확실하다. 이 위계의 가장 높은 곳에는 날 때부터 매력적이며 질투를 느껴본 적 없고 남의 질투에도 무심한 캐릭터들이 존재하는데, 이런 속 터지는 불공평이 열등감을 가진 이들의 시선으로 그려진다.</p> <p><br /> 내가 더 예쁘길, 내가 더 관심받길 바라는 별 것도 아닌(그러나 본인에겐 절실한) 욕망과 선망을 구체적이면서도 못나지 않게 표현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콤플렉스를 가진 자만이 감정의 비밀을 알지만 표현은 자기 객관화를 거쳐야 가능하고, 워낙 못나고 부끄러운 감정이라 왜곡하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안노 모요코는 거기에 특기가 있는 작가였다. 여자아이의 질투와 동경을 매우 현실적으로, 그러나 상쾌하게 그려냈다. 열등감에 시달렸던 10대 시절의 나는 그 점에 열광한 게 아니었나 싶다.</p> <p><br /> 안노 모요코는 이제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안노 히데아키의 부인으로, 그와의 결혼 생활을 코믹하게 풀어낸 <감독부적격>으로 더 유명하다. 건강 문제로 장편 창작을 쉬는 사이 국역본들은 모두 절판됐다. 한국 출판계에서 매우 중요한 만화 전문 출판사의 편집자가 ‘언젠가 안노 모요코 전집을 내보고 싶다’는 꿈을 이야기했을 때 너무나 반가웠지만, 우리 둘 다 현재 시장 상황에선 좋은 기획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했다.</p> <p><br /> 일본 여성 만화의 계보, 적절한 평론 등 안노가 존재하는 토양까지 번역되어 제대로 조명된다면 좋지 않을까 가끔 생각해 보지만 원래 그만한 대접 받는 세상 것들의 숫자는 정해져 있는 법이다. 이렇게 시큰둥한 스스로의 말투가 왠지 서글프다. 이제 그녀의 작품 자체나 작품 속에서 묘사한 동경(東京)이란 장소, 동경(憧憬)이란 심리 모두 만만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오랜만의 신작 <버팔로 5인의 딸>이 번역된다면, 분명 상기된 얼굴로 서점에 달려갈 것이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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